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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신념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는 인생에서 개인적인 신념을 추구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그리스도인에게 있어 개인적인 신념이란 성경, 묵상,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상호작용함으로써 우리가 품고 있는 뿌리 깊은 신념, 가치관, 열정을 말합니다.바울이 “...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옵니다.” 5로마서 10:17, NKJV (신앙을 가진다는 것의 의미 참조) 실제로,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초점을 맞추면 개인적인 확신을 형성할 수 있는 새로운 생각과 현실을 깨닫게 됩니다.따라서 바울은 우리의 마음을 하늘의 실체에 집중하라고 격려했습니다. 골로새서 6:2, NKJV.
또한 기도는 우리의 개인적인 신념을 형성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7장 5:17, NKJV 참조).성경, 기도, 묵상을 통해 하나님과 더 많이 교제할수록 그분이 인생에서 추구해야 할 것들이 우리 마음에 더 분명해집니다.개인적인 신념을 실천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목적을 부여하기 위해 지정하신 것들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그러므로 우리가 성취된 삶을 살려면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놓으신 것들을 따르는 것이 우리에게 중요할 것입니다.
개인적인 신념은 우리의 길을 인도하고 삶에 집중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우리의 뿌리 깊은 신념, 가치, 열정을 공유하는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게 될 것이며, 그들은 우리를 끝까지 격려하고 지지해 줄 것입니다.하지만 인생에서 개인적인 신념을 추구하려 할 때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낙담시킬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그들이 낙담하는 것은 그들이 우리의 비전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우리가 믿었던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습니다.우리는 그런 사람들이 누구든 관계없이 주저하지 말고 멀리해야 합니다.성경에 대한 개인적인 확신이 있었던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겠습니다.
룻은 나오미와 함께 지내다가 다윗 왕의 증조할머니가 된다
그러나 나오미가 이르되, 내 딸들아, 물러가라. 어찌하여 나와 함께 가려 하느냐?내 뱃속에 아직도 네 남편이 될 아들들이 있느냐?그러나 룻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를 간청하건대, 너를 떠나지 말고, 너를 따르던 길에서 돌아서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나는 가고, 네가 어디에 머물든지 나는 유숙할 것이니, 네 백성은 내 백성이 되고, 네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네가 죽는 곳에는 나도 죽고 거기 묻힐 것이다.죽음 말고는 너와 나를 갈라놓는 일이 있으면 주님께서 나에게, 더구나 나에게 그렇게 해 주옵소서.”함께 가기로 결심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녀는 말을 멈췄습니다.이제 두 사람은 베들레헴에 도착할 때까지 갔습니다.그들이 베들레헴에 이르렀을 때 온 도시가 그들 때문에 들떠서 여자들이 이르되, 이 사람이 나오미냐?
룻기 1:11, 16-19 (뉴 킹 제임스 버전)
과부였던 나오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지만 두 며느리는 남았습니다.며느리를 돌봐줄 아들이 더 이상 없자, 그녀는 딸들에게 친척들에게 돌아가라고 부탁했다.사실 그녀는 아들을 더 낳기에는 너무 나이가 들었기 때문에 가족을 떠나라고 설득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오르파라는 두 식구 중 한 명이 나오미가 한 말에 공로를 깨닫고 친척들에게 돌아갔습니다.그녀는 나오미의 말을 듣고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마음을 굳혔습니다.반면, 다른 한 명인 루스는 나오미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친척에게 돌아가기를 거부했다.오히려 그녀는 나오미와 함께 지내기로 했다.요점은, 루스가 가족에게 돌아가라는 권고를 받은 후 왜 시어머니와 함께 머물기로 했을까요?
그녀는 나오미와 함께 지내겠다는 개인적인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그게 전부였습니다!나오미는 그 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녀의 설득이 어찌되었든 룻은 오르파처럼 떠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룻은 모압 여인이었으며 나오미 가족과의 결혼을 통해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대화하는 법을 배웠을 수도 있다는 점을 기억해 주세요.개인적인 확신이 있을 때는 아무리 타당한 추리로도 극복할 수 없습니다.결국 룻은 나오미의 권고를 통해 나오미의 친척인 보아스와 결혼할 기회를 얻었고, 후에 룻은 오벳을 낳았고, 그는 이새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이시는 다윗 왕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 왕의 혈통에서 태어나셨습니다.룻은 나오미와 함께 남겠다는 신념을 따랐기 때문에 충만한 삶을 살았습니다.
다윗의 신념은 엘리압을 극복하고 골리앗을 물리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다윗이 곁에 선 사람들에게 이르되, 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이스라엘의 치욕을 빼앗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할례받지 않은 이 블레셋 사람이 누구길래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군대를 거역하겠느냐?”그러자 백성들도 똑같이 그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를 죽인 사람에게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이제 그의 맏형 엘리압이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을 들었더라.엘리압이 다윗에게 노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내려왔느냐?그리고 광야에 그 몇 마리의 양들을 누구와 함께 남겨 두었습니까?네가 싸움을 보러 내려왔기 때문에 나는 네 생각과 네 마음의 악을 잘 안다.”그러자 데이비드가 말했죠. “내가 지금 뭘 한 거지?그냥 말 한 마디가 아니었나요?”그러자 그는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다른 사람을 바라보더니 사람들이 전과 같이 다시 대답했다.다윗이 한 말을 듣고 그들은 사울 앞에서 그 말을 되풀이하자 사울이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왔다.다윗이 사울에게 이르되, 아무도 그를 인하여 마음이 쇠약해지지 않게 하라.당신의 종이 가서 이 블레셋 사람과 싸울 것입니다.
사무엘상 17:26-32 (뉴 킹 제임스 버전)
양치기 소년으로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이 된 다윗은 할례받지 않은 블레셋의 거인 골리앗을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그는 확신이 생겨 위태로운 보상에 대해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는 골리앗을 죽일 사람에게 주어질 상을 확신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엘리압은 다윗이 포상에 대해 질문을 한다는 말을 듣고 짜증이 났다.그는 데이비드의 호기심을 자부심으로 해석했다.데이비드는 자신이 거대한 살인범이라고 생각했지만 엘리압은 그럴 가능성을 보지 못했습니다.엘리압은 다윗이 골리앗을 죽일 사람에 대한 보상에 대해 왜 질문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결국 이 전투에서 그들을 이끌기로 되어 있던 사울 왕은 거인을 무서워했습니다.또한 훈련을 받은 군인들도 골리앗에 대한 공포로 인해 불구가 되었고 이스라엘 온 민족도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다윗은 형의 반응을 보고 그에게서 멀어졌습니다.엘리압은 이스라엘 군인들과 온 이스라엘 백성이 두려워했으니 다윗도 두려워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하지만 문제는 다른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기 때문에 두려워해야 하는 걸까요?절대 아니죠!우리는 모두 인생에서 서로 다른 경험을 하고 있으며, 그 사실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따라서 모든 사람이 우리와 같은 방식으로 상황에 반응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다윗이 자기를 멸시했다는 이유로 형에게서 등을 돌렸다면, 우리도 자신에게 가장 잘 알려진 이유로 우리를 경멸하고 낙담시키는 사람들에게서 멀어져야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마음에 두신 것을 추구하라는 형의 의견을 무시했습니다.골리앗을 어렵지 않게 상대할 수 있다는 개인적인 확신이 그에게 속삭였다.그의 확신은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그가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했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그의 개인적인 신념은 하나님에 기반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동생이 자신에 대해 말하거나 생각하는 것 때문에 그 신념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그는 골리앗을 물리치고 싶은 끊임없는 열망을 품고 있었습니다.모두가 두려워했지만, 그는 자신이 골리앗을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찾아갔습니다.형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그는 개인적인 신념을 따랐습니다.
실제로 골리앗 앞에 설 기회가 생겼을 때 그는 물매와 돌로 그를 죽였습니다.우리의 개인적인 확신은 대개 하나님과의 관계 및 인생에서의 경험에 기초한다는 점을 항상 명심해야 합니다.그래서 다윗은 사울 왕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의 도움으로 사자와 곰을 다루었던 경험을 언급한 것입니다.인생에서의 경험은 우리 앞에 놓인 미래를 위해 우리를 준비시키고 강화시켜 주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저는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치고 성취감을 느꼈다고 굳게 믿습니다.인생에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잠재력을 의심할 때 자신이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을 성취하는 것만큼 성취감을 주는 것은 없습니다.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것은 꿈을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열심히 노력하는 것입니다!
여호사밧 왕: 개인적인 확신이 없으면 죽음이 될 수 있습니다!
이제 시리아와 이스라엘 사이에 전쟁이 없는 지 3년이 지났습니다.그러고 나서 삼년에 유다 왕 여호사밧이 이스라엘 왕을 만나러 내려갔습니다.이스라엘 왕이 신하에게 이르되 길르앗에 있는 라못이 우리 소유인 것을 아느냐 우리가 주저하여 아람 왕의 손에서 빼앗고 싶은즉그래서 그는 여호사밧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와 함께 길르앗 라못에서 싸울 수 있겠습니까?”그래서 병거 지휘관들이 여호사밧을 보고 말하기를, “정녕 이스라엘의 왕이로소이다!”그래서 그들은 그와 싸우려고 뒤로 물러서자 여호사밧이 소리쳤다.
킹1서 22:1-3, 32 (뉴 킹 제임스 버전)
이 전쟁의 이유는 시리아 왕이 원래 이스라엘 왕의 관할하에 있던 도시인 라모스 길르앗을 장악했기 때문입니다.이런 이유로 이스라엘 왕 아합은 라모스 길르앗을 탈환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그러자 아합은 유다 왕 여호사밧에게 자신과 동맹을 맺어 라못 길르앗 탈환을 위해 시리아 왕과 싸울 것을 요청했습니다.여호사밧은 개인적인 신념에도 불구하고 아합과 동맹을 맺기로 동의했습니다.두 왕은 힘을 합쳐 시리아 왕과 전쟁을 벌였습니다.
흥미롭게도 시리아 군인들은 전쟁터에서 여호사밧을 보고 그가 아합인 줄 알고 그를 죽이려고 진격했습니다.여호사밧은 자신의 생명이 위험하다는 것을 깨닫고 울부짖었습니다.이때 시리아 군인들은 자신들이 아합으로 착각한 사람이 여호사밧이라는 것을 깨닫고 등을 돌렸습니다.여호사밧은 전쟁에 나가겠다는 다른 사람의 신념을 따랐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습니다.개인적인 확신이 없다면 우리는 마치 사람의 손에 있는 진흙처럼 될 것이며, 사람들은 우리에게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대로 우리를 틀고 만들어 줄 것입니다.즉, 인간은 하나님이 아닌 자신이 기뻐하는 방식으로 우리를 사용한다는 뜻입니다.그저 따르기 위해 따라하기만 하면 인생의 좌절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신앙인으로서 우리는 지위에 상관없이 하나님이 지시하지 않는 곳으로 가거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라고 부르지 않은 일을 하기를 원하는 누구의 시도에도 저항할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인생에서 확고한 확신을 키우는 가장 안전한 방법은 성경, 묵상, 기도를 통해서입니다.우리가 그러한 행동을 통해 우리 자신을 하나님과 일치시킬 때, 그분은 우리가 삶에서 따라야 할 많은 것들을 우리 마음에 새겨 주실 것입니다.“사람의 모든 행위가 자기 눈에는 순결하지만 여호와께서 영을 감찰하시느니라.” 8잠언 16:2, NKJV
우리는 낙담과 반대, 루스나 데이비드와 같은 도전에 직면했을 때 인생에서 개인적인 신념을 따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말이나 생각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두신 확신을 따르지 않는 것은 분명 우리에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오히려 우리는 패배감을 느끼고 인생에서 성취감을 느끼지 못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 자신을 하나님과 일치시키지 못하면 인생의 목적을 가져다주는 참된 신념을 잃게 됩니다.그러므로 우리는 개인적인 확신이 부족할 것입니다.개인적인 확신이 없으면 우리는 여호사밧처럼 인생의 모든 것을 따르는 경향이 있습니다.이런 일이 생기면 우리 삶에서 지속적인 좌절과 패배를 피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불을 계속 태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