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백성을 저주하지 말라. 그들은 축복을 받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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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예

모세는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여겨집니다.그는 선지자, 제사장, 왕이었습니다.하지만 그는 한 번도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권위를 남용한 적이 없습니다.오늘날 이 세 가지 직책을 맡고 있는 교회 지도자는 아무도 없습니다.따라서 목사들이 자신의 직위를 이용해 자신들과 싸우고 있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을 저주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이에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가 결혼한 에티오피아 여인을 인하여 모세를 원망하였으니 이는 그가 에티오피아 여인과 결혼하였기 때문이더라.”

민수기 12:1 (뉴 킹 제임스 버전)

미리암과 아론이 민수기 12장 1절에서 모세를 욕했을 때 모세는 그들을 저주하지 않았습니다.모세는 자신이 가진 모든 권세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반하는 말을 했다고 해서 그들을 저주하지 않았습니다.오히려 그들의 행동이 하나님의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주님은 그 문제에 개입하셨다.이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일환으로 미리암은 문둥병자가 되었지만 모세는 결코 그녀를 저주하지 않았습니다.대신 그는 미리암의 나병에 대해 걱정하게 되었고, 미리암의 치유를 위해 기도했다.

더 설교

연단 뒤에 서서 사람들에게 저주를 퍼붓는 목사에게는 모든 문제가 있습니다.기독교인이 어떤 사안, 특히 교회에서 다른 기독교인을 저주하는 것은 부적절합니다.진심으로, 저는 이것이 권위 남용이라고 생각합니다.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이런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우리는 모든 기회를 이용해 연단에 서서 그리스도의 인격과 구속 사역에 대해 이야기해야 합니다.또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을 추구하도록 격려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어떤 이유에서든 저주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교회에 온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연단에서 나오는 메시지는 사람들의 복지를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강단은 교회 안에서 신성한 물건입니다.따라서 목회자들은 백성들의 영적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그것을 지지하는 것을 특권으로 여겨야 합니다.우리는 연단 뒤에서 한 말을 할 때 반드시 측정해야 합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말을 할 때마다 심판 날에 그 말을 해석할 것이다.” 8마태복음 12:36, NKJV.성직자들은 이 성스러운 물건을 다른 사람들과 개인적인 점수를 정산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방편으로 빠져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개인적인 문제는 연단 뒤에서 다루어서는 안 됩니다.

사도들의 모범

“그 무렵, 제자들의 수가 많아졌을 때, 헬레니스트들이 히브리인들에게 불만을 제기했는데, 이는 그들의 과부들이 매일의 배급에 소홀했기 때문이다.그러자 열두 사도가 많은 제자들을 불러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서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 명을 구하십시오. 우리가 이 일을 맡을 수 있는 사람을 임명할 수 있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기도와 말씀 사역에 전념할 것입니다.”그리고 그 말이 온 군중을 기쁘게 했습니다.그리고 그들은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인 스테반과, 필립, 프로코로스, 니카노르, 티몬, 파르메나스, 그리고 안디옥 출신의 개종자인 니콜라스를 선택했습니다.”

사도행전 6:1-5 (새 킹제임스 버전)

초대 교회의 과부들이 매일 배부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이 빠졌다고 불평했을 때, 사도들은 그 문제의 타당성을 알아차렸다.사도들은 교회 내에서 상황을 처리할 수 있는 일곱 명을 지명하라고 지시했다.흥미롭게도 사도들은 이 책임을 맡을 사람들을 선정하는 데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대신 그들은 7명의 선발을 제자들에게 위임하고 선발 기준만 제시했습니다.제자들은 성령이 충만하고 문제를 해결할 지혜를 가진 사람을 뽑아야 했다.초대 교회 회원들은 일곱 명을 정확히 선정했습니다.선택된 일곱 명은 문제가 재발하지 않도록 했다.따라서 모든 회원이 충분히 똑똑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교회 목사는 반드시 자신의 노트를 수정해야 합니다.사도들은 과부들이 교회의 일원이라는 사실만 이해했고, 그들의 걱정은 결코 하찮게 여겨질 수 없었습니다.문제는 마땅히 받아야 할 긴급한 방식으로 처리되었습니다.

오늘날 이야기는 다릅니다!교회에서는 사람들을 숫자로 취급하고 그들의 정당한 염려를 무시합니다.회원들은 목사들과 함께 교회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로 간주되지 않습니다.오히려 정당한 우려를 제기하는 회원은 교회를 고발한 것으로 간주되어 때때로 저주를 받기도 합니다.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교회의 문제를 지적하는 사람은 누구나 사랑에서 비롯된 행동을 할 가능성이 높으며 문제가 해결되기를 원한다는 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마틴 루터가 95개의 논문을 써서 문 앞에 못을 박은 것은 가톨릭 교회가 싫었기 때문일까요?오늘 우리는 당시 교회의 오류를 지적한 마틴 루터에게 축하와 박수를 보내며, 같은 이유로 우리 교회 회원들을 저주합니다.무슨 역설인가?마틴 루터는 진리를 사랑하고 교회의 잘못이 바로잡히는 것을 보게 된 동기가 되었습니다.안타깝게도 많은 기독교인과 교회 지도자들은 그런 사람들을 참을 수 없습니다.

당나귀가 발람을 꾸짖다

“여호와께서 나귀의 입을 여시매 그녀가 발람에게 이르되 내가 네게 무슨 일을 행하여 이렇게 세 번이나 나를 쳤느냐?”발람이 나귀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학대했기 때문이로다.내 손에 칼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지금이라도 너를 죽여버릴 거야!”그래서 당나귀가 발람에게 이르되, 내가 네 것이 된 후부터 오늘날까지 네가 타고 온 네 나귀가 아니냐?내가 너한테 이런 짓을 하고 싶었던 적이 있었나?”그러자 그는 “아니요.” 라고 했죠.그때에 야훼께서 발람의 눈을 뜨시자, 야훼의 천사가 칼을 빼어 손에 들고 길에 서 있는 것을 보고, 발람은 머리를 숙이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

민수기 22:28-31 (뉴 킹 제임스 버전)

하나님께서 선지자 발람에게 말씀하시려고 나귀의 입을 벌리셨습니다.발람은 하느님께서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 말고,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축복을 받았기 때문이다.” 라고 말씀하셨을 때, 발람은 하나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9민수 22:12, NKJV.요점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했을 때 당나귀를 통해 선지자와 이야기를 나눴다는 것입니다.아마도 그것만이 하나님께서 선지자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을 것입니다.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주의를 끌기 위해 어떤 방법으로든 가실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이 전체 에피소드에서 흥미로운 점은 하나님께서 당나귀를 통해 선지자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말씀하실 때 당나귀로 말씀하실 수 있다면, 교회 회원도 그 지도자들에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회원이 문제를 제기하면 목사는 공로를 인정하여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어떤 장점이 있다면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하지만 장점이 없다면 그 이유에 대해 정중하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물론 회원들이 너무 지나칠 수도 있지만, 장관들은 구성원과 그들의 기대를 관리할 책임이 있습니다.이는 사람들이 자신이 경멸적인 대우를 받거나 존중을 받을 때를 인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염소를 차는 것은 어렵다

“그가 길을 가다가 다마스쿠스 근처에 이르렀는데, 갑자기 하늘로부터 빛이 그의 주위를 비추었다.그러자 그는 땅에 쓰러졌고, 그에게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라는 음성이 들렸다.그러자 그는 “주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고 물었습니다.그러자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너는 겁쟁이를 걷어차기가 힘들다.”

사도행전 9:3-5 (새 킹제임스 버전)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주 예수님을 만났습니다.예수님은 바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짐승을 차기가 어렵다.”우리가 이 말을 이해하기만 한다면 사람들이 우리나 교회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지 별로 신경 쓰지 않을 것입니다.거북이를 걷어차는 것은 주 예수님과 그분의 교회를 거르는 것과 같습니다.이것은 그 일을 하는 사람을 파멸로 이끌 것이며, 바로 주 예수님이 암시하신 바입니다.

다시 말해, 정당한 이유 없이 교회와 그 지도부에 반대할 때 자폭 버튼을 누르는 것입니다.우리 주 예수님의 이 말씀을 우리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주 예수님과 그분의 교회를 위해 싸우는 책임을 떠맡게 되었습니다.사람들이 주 예수님과 그분의 교회를 위해 싸우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세뇌와 지나친 열심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나 그분의 교회를 위해 싸울 사람을 부르지 않으셨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칼을 제자리에 두라. 칼을 잡는 자는 모두 칼에 죽으리라.아니면 내가 지금 내 아버지께 기도를 드려도 그분께서 열두 군단 이상의 천사들을 내게 공급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느냐?”10마태복음 26:52-53, NKJV.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한 번 성도들에게 전해졌던 믿음을 위해 열렬히 싸워야 합니다.”11유다 1:3, NKJV.바울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라”라고 말하면서 이 점을 다시 강조했습니다. 121디모데 6:12, NKJV.즉, 우리가 믿는 것을 믿는 이유에 대해 건전한 설명을 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결론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 앞에 설 때마다 삶을 변화시키는 메시지를 전하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어떤 이유에서든 개인적인 문제를 다루거나 연단 뒤에 있는 사람들에게 저주를 퍼붓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특정한 문제에 대해 저주를 퍼붓는 것 말고는 의미 있는 말을 할 수 없을 때는 침묵하는 것이 최선입니다.우리는 저주를 결코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 이유 없는 저주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13잠언 26:2, NKJV.그보다는 진리를 수호할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이것이 바로 바울이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라고 말한 이유입니다. 고린도 142서 13:8, NKJV.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불을 계속 태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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